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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지도자를 말 한마디로 전원 살해할 수 있는 무기가 미성년자 손에 쥐어졌다가, 처음 본 낯선 어른에게 그대로 건네진다. 이 장면을 보는 순간 저는 웃음보다 등골이 서늘했습니다. 재미있는 오락 영화라는 데는 이견이 없지만, 그 서늘함이 사라지지 않아서 이 글을 씁니다.

미디어 조작과 가짜 진실 — 영화가 진짜 하고 싶었던 말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높이 평가하는 부분은 액션도, 톰 홀랜드의 연기도 아닙니다. 미스테리오가 구사하는 홀로그램 기술, 그리고 그 기술이 대중에게 먹혀드는 방식입니다.
미스테리오가 엘리멘탈이라는 가짜 괴물을 만들어 영웅 행세를 하는 구조는 단순한 빌런 설정이 아닙니다. 딥페이크(Deepfake) — 인공지능으로 실제처럼 보이는 가짜 영상을 생성하는 기술 — 의 작동 원리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영화 속에서도 미스테리오의 팀이 드론과 홀로그램 프로젝터를 통해 가상의 재난을 연출하는 과정이 꼼꼼하게 묘사되는데, 저는 그 시퀀스가 현실의 조작된 미디어 환경을 거울처럼 반영하고 있다고 봤습니다.
미스테리오가 내뱉는 대사 중 가장 날카로운 것은 "사람들은 믿고 싶었던 것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아이언맨이 사라진 세계에서 대중은 누구라도 영웅처럼 보이면 믿어버립니다. 이것은 허구 속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제로 MIT 미디어랩 연구에 따르면 소셜미디어에서 가짜 뉴스는 진짜 뉴스보다 6배 빠르게 확산된다고 보고된 바 있습니다(출처: Science, Vosoughi et al., 2018).
엔딩에서 JJJ가 조작된 영상을 내보내며 피터 파커의 정체를 폭로하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편집된 영상 한 편이 무고한 사람을 순식간에 살인자로 만들어버리는 구조 — 정보 비대칭(Information Asymmetry), 즉 정보를 가진 쪽이 그렇지 못한 쪽을 일방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상황 — 이 여기서 아주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여기서 정보 비대칭이란 한쪽은 진실을 알고 다른 쪽은 조작된 정보만 접하는 불균형 상태를 말하며, 가짜 뉴스 확산의 핵심 구조이기도 합니다.
제가 직접 영화를 보면서 느낀 건, 위기의 순간에도 스마트폰 카메라를 들이미는 군중 장면이 예상 밖으로 불편했다는 겁니다. 처음엔 웃음 코드인 줄 알았는데, 볼수록 그 장면이 우리 자신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오히려 씁쓸해졌습니다.
- 홀로그램 기술로 가상의 재난을 연출하는 미스테리오의 방식은 현실 딥페이크 기술과 구조적으로 일치한다
- 대중은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는 영화의 진단은 가짜 뉴스 확산 연구와 맥을 같이한다
- JJJ의 편집 영상은 정보 비대칭이 개인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 스마트폰 군중 장면은 유머가 아니라 현대 미디어 소비 행태에 대한 냉소적 비판이다
서사 독립성과 EDITH — 스파이더맨은 어디 있는가
이 영화의 치명적인 약점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스파이더맨이 나오는데 스파이더맨 이야기가 없습니다.
서사 독립성(Narrative Autonomy)이란 시리즈물에서 개별 작품이 외부 세계관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적인 이야기 구조를 완결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제가 직접 이 영화를 봤을 때, 아이언맨 시리즈를 모르는 지인과 함께 관람했는데, 그분은 EDITH가 뭔지, 닉 퓨리가 왜 나오는지, 마리아 힐이 누구인지 처음부터 끝까지 물어봤습니다. 영화는 단 한 번도 설명하지 않았고, 저도 옆에서 계속 귀띔해줘야 했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빌런입니다. 히어로를 완성하는 것은 결국 그에 걸맞은 빌런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이언맨에게는 만다린과 오베디아 스탠, 캡틴에게는 하이드라(HYDRA) —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비밀리에 암약한 나치 산하 테러 조직 — 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파이더맨의 적은 킹핀도, 그린 고블린도, 닥터 옥토퍼스도 아닌, 아이언맨에게 해고당해 앙심을 품은 전직 스타크 직원입니다. 스파이더맨이 아이언맨의 민원 처리 창구로 전락한 셈입니다.
EDITH(Even Dead, I'm The Hero)는 이 문제를 더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EDITH란 토니 스타크가 피터 파커에게 유증한 AI 무기 통제 시스템으로, 전 세계 군사 위성과 드론 부대를 단독으로 지휘할 수 있는 초월적 살상 시스템입니다. 저는 이 설정이 울트론보다 더 위험한 전제라고 봤습니다. 울트론은 스스로 판단하는 AI였지만, EDITH는 인간의 명령에 즉각 반응합니다. 즉 사용자의 의도와 도덕성에 모든 것이 달려 있는 구조입니다.
그런데 피터는 이 시스템을 두 번 만난 사람에게 그냥 넘겨버립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 아무리 부담을 느낀다고 해도, 수억 명의 생사를 좌우하는 무기를 "나보다 잘할 것 같다"는 이유로 포기하는 열일곱 살 소년은 철없는 게 아니라 설정 자체가 허술한 겁니다. 실제로 AI 윤리 연구자들은 자율 살상 무기 시스템(LAWS, Lethal Autonomous Weapons Systems) — 인간의 개입 없이 표적을 선정하고 공격할 수 있는 무기 체계 — 의 통제 주체 문제를 가장 심각한 국제 안보 위협으로 꼽고 있습니다(출처: 국제적십자위원회(ICRC), 자율 무기 시스템 보고서).
그리고 EDITH를 손에 넣은 미스테리오가 가장 먼저 떠올린 계획이 "영국 여왕과 각을 뜨는 것"이었다는 부분에서는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세계 지배가 가능한 시스템을 쥐고서 영국 여왕 타령을 하는 빌런은, 제가 본 마블 빌런 중 가장 야망이 소박한 인물이었습니다.
피터 파커의 각성 계기도 아쉽습니다. 해피 호건과 짧은 대화 몇 마디를 나눈 뒤 모든 갈등을 극복하고 비행기에서 혼자 슈트를 만드는 장면 — 레드 제플린 음악이 흐르고 토니 스타크가 연상되는 그 장면 — 은 마블 팬이라면 뭉클했겠지만, 제 경우엔 감동보다 허탈감이 앞섰습니다. 성장의 계기가 내부의 갈등과 선택에서 비롯되지 않고 외부 오마주로 채워진다는 느낌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 전작 안 보고 봐도 이해되나요?
A. 제 경험상 꽤 힘듭니다. 아이언맨 시리즈,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엔드게임을 모르면 EDITH가 왜 피터 손에 있는지, 닉 퓨리가 왜 등장하는지, '블립 현상'이 무엇인지 영화 안에서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스파이더맨 홈커밍을 봤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 전체를 어느 정도 이해한 상태에서 봐야 온전히 즐길 수 있는 구조입니다.
Q. 미스테리오가 다중우주에서 왔다는 게 거짓말이면, 다중우주 설정은 취소된 건가요?
A. 이 부분은 의견이 갈리는데, 저는 다중우주 자체가 부정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미스테리오가 거짓말쟁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지, 다중우주라는 개념 자체가 부정된 것은 아닙니다. 닉 퓨리 행세를 하던 스크럴이 다중우주 이야기를 듣고도 의심하지 않았다는 점이 그 근거입니다. 이후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에서 다중우주가 본격 등장한 것도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Q. EDITH가 실제로 현실에 존재한다면 얼마나 위험한가요?
A. 자율 살상 무기 시스템(LAWS)의 관점에서 보면 EDITH는 현재 국제 사회가 가장 우려하는 시나리오와 거의 동일합니다. 국제적십자위원회(ICRC)는 인간의 감독 없이 표적을 선정·공격할 수 있는 시스템의 확산이 국제 인도법의 근간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영화 속 설정처럼 통제권이 단 한 명의 개인에게 집중된다면, 그것은 국가 안보 시스템 전체를 무력화할 수 있는 실존적 위협이 됩니다.
Q.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 그래도 볼 만한 영화인가요?
A. 오락 영화로서는 충분히 볼 만하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고, 저처럼 서사의 허술함이 계속 걸리는 분들도 있습니다. 시각 효과와 코미디 밀도는 높은 편이고, 미스테리오와의 후반 대결 시퀀스는 히어로 영화 중에서도 연출이 훌륭한 편입니다. 다만 독립된 스파이더맨 이야기를 기대했다면 실망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결론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은 저에게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영화로 남아 있습니다. 딥페이크, 정보 비대칭, 미디어 조작이라는 시대적 화두를 히어로물 안에서 이렇게 선명하게 표현한 작품은 흔치 않습니다. 미스테리오의 홀로그램 기술이 현실 세계의 가짜 뉴스 구조와 포개지는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감탄했습니다.
하지만 그 감탄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EDITH라는 전례 없는 살상 시스템이 허술한 개연성 위에서 이리저리 넘겨지고, 스파이더맨은 끝내 아이언맨의 그늘 밖으로 한 발짝도 나오지 못했습니다. 서사 독립성이 없는 히어로는 슈트를 바꿔 입어도 여전히 누군가의 후계자일 뿐입니다. 제 최종 평점은 10점 만점에 6점입니다. 다음 편에서는 피터 파커 자신의 이야기를, 그의 빌런과 함께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