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개발 열기가 한창인 강릉. 지역 조직의 실세 김길석은 힘보다 질서와 의리를 중시하며 나름의 규칙 안에서 조직을 관리합니다. 그러나 리조트 사업권을 차지하려는 이민석이 나타나면서 오랫동안 유지되던 균형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영화 《강릉》은 리조트라는 거대한 이권을 놓고 충돌하는 두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조직 간의 전쟁을 다룬 범죄 액션물이지만, 그 안에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살아온 길석과 민석의 생존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리조트 지분으로 시작된 조직의 균열길석은 강릉 조직의 이인자로, 부하를 함부로 희생시키지 않고 경찰인 친구 조방현과도 오랜 관계를 유지합니다. 폭력조직에 몸담고 있지만 가능한 한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인물입니다. 회장 오근성은 그런 길석에게 새로 ..
주의: 이 글에는 영화 《어쩔수가없다》의 주요 사건과 마지막 장면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한밤의 시골길, 고장 난 자동차를 살펴주는 남자의 등 뒤에서 운전자가 권총을 꺼냅니다. 방아쇠를 당기는 사람은 타고난 범죄자가 아니라 25년 동안 종이를 만들며 가족을 책임져 온 가장 만수입니다. 그는 왜 취업 경쟁자를 살해하게 되었고, 아내 미리는 마당에서 시신을 발견하고도 왜 다시 흙으로 덮었을까요? 영화는 그 답을 “어쩔 수가 없다”는 말 속에 숨겨 둡니다.25년 경력이 한순간에 사라진 만수태양제지 특수지 부문에서 일하던 만수는 아내 미리, 두 아이, 반려견과 함께 어렵게 되찾은 집에서 만족스러운 삶을 누립니다. 그러나 회사가 외국계 자본에 인수되면서 갑작스럽게 해고됩니다. 회사에서 보낸 장어는 포상이 아니라 일..
단체 티셔츠를 맞춰 입고 경주로 떠나는 엄마와 세 딸. 겉으로만 보면 오랜만에 가족여행을 떠나는 평범한 네 모녀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탄 봉고차 트렁크에는 8년 전 막내딸 경주를 죽인 살인범 백상현이 묶여 있습니다. 영화 경주기행은 가해자를 직접 단죄하기 위해 길을 나선 가족의 복수극이지만, 통쾌한 응징만을 보여주는 작품은 아닙니다. 서로 다른 방법으로 상실을 견뎌온 엄마와 딸들이 복수라는 하나의 목표 앞에서 충돌하는 과정을 블랙코미디와 스릴러로 풀어냅니다.가족여행으로 위장한 8년의 복수 계획엄마 옥실과 세 딸 장주, 영주, 동주는 막내 경주의 생일을 맞아 단체 티셔츠까지 입고 여행을 떠납니다. 가족이 향하는 목적지는 경주입니다. 이곳은 막내의 이름이면서 동시에 수학여행을 떠났던 경주가 살인 사건..
누군가 내 얼굴과 이름, 주민등록번호와 지문까지 완벽하게 훔쳤다면 나는 어떻게 내가 진짜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을까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들쥐는 한국 전통 설화 ‘손톱 먹은 들쥐’를 현대적인 신분 탈취 공포로 바꾼 미스터리 추적 스릴러입니다. 착한 피해자가 악한 가짜에게 복수하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결함과 욕망을 지닌 인물들이 서로를 쫓는 피카레스크 구조라는 점에서 더욱 서늘하게 다가옵니다. 손톱 먹은 들쥐 설화의 현대적 변신들쥐는 루드비코 작가의 동명 카카오웹툰을 원작으로 제작된 10부작 시리즈입니다. 원작과 드라마는 사람이 버린 손톱을 먹은 쥐가 그 사람과 똑같은 모습으로 변한다는 한국 전통 설화에서 출발합니다.과거의 설화에서는 가족이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과정이 중요했다면 드라마는 얼..
도박판에서 정말 무서운 것은 좋은 패일까요, 아니면 나도 모르게 반복하는 습관일까요. 영화 타짜: 원 아이드 잭을 보면서 저는 카드보다 사람의 리듬이 먼저 읽힌다는 말이 가장 오래 남았습니다. 메이드 패를 잡았을 때와 블러핑할 때 카드 놓는 속도가 달라지고, 콜을 외치는 박자가 미묘하게 흔들리는 순간 상대는 이미 패를 보여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 작품은 화려한 기술을 보여주는 범죄 오락영화이면서도, 결국 인간의 욕망과 자기기만이 어떻게 삶을 무너뜨리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였습니다.카드보다 먼저 읽히는 것: 습관과 블러핑의 심리전초반 포커 장면에서 강조되는 것은 패의 서열보다 사람의 행동입니다. 메이드가 됐을 때 카드를 단정하게 정리하고, 블러핑을 할 때는 평소보다 반 박자 빠르거나 느리게 콜을 외칩니다..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요양보호사라는 직업이 얼마나 극단적인 감정노동을 요구하는지 제대로 몰랐습니다. 영화 는 주거 빈곤과 돌봄 노동의 굴레에 갇힌 한 여성이 우발적 사고 하나로 파국을 향해 내달리는 심리 스릴러입니다. 보는 내내 "이건 픽션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돌봄 노동의 민낯 — 요양보호사 문정이 사는 방식일반적으로 요양보호사는 "노인을 돌보는 따뜻한 직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영화를 보면서 실감한 건 전혀 달랐습니다. 주인공 문정은 비닐하우스, 그러니까 농업용 비닐 구조물 안에서 생활하며 치매 노인 가정을 오가는 요양보호사입니다. 집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공간에서 하루를 시작하고, 소년원에 있는 아들과는 일주일에 한 번 영상 통화를 ..
드라마 속 장면인데도 뉴스를 보는 것 같아 불편했습니다. 전도연, 김고은 주연의 는 캐스팅과 감독이 여러 차례 바뀌는 우여곡절 끝에 공개됐는데, 막상 보고 나니 그 과정이 무색할 만큼 묵직한 작품이었습니다. 두 여성의 자백 거래라는 설정 뒤에, 부실 초동 수사와 언론 플레이, 그리고 사이버 렉카가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를 아주 촘촘하게 그려냅니다.여론재판과 초동 수사 부실, 어디까지가 드라마일까뉴스에서 피의자의 무표정한 얼굴이 클로즈업될 때, 저는 그 장면이 왜 이렇게 길게 방송되는지 항상 의아했습니다. 자백의 대가에서 윤수가 남편 장례식에서 웃으며 조문객을 맞이하는 장면이 살인 혐의의 증거처럼 소비되는 방식을 보면서, 그 의아함이 다시 올라왔습니다.드라마는 초동 수사(初動 搜査)의 문제를 ..
만약 전화기를 들었는데 20년 전 같은 집에 살던 사람이 받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영화 《목소리》는 그 황당한 전제를 아주 진지하게 밀어붙이는 작품입니다. 제가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설마 이게 말이 돼?" 싶었는데, 보고 나서는 한동안 전화벨 소리가 무섭게 느껴졌습니다. 타임슬립 소재의 스릴러인데, 장르적 재미를 넘어 윤리적으로 꽤 불편한 질문들을 남기는 영화입니다.타임슬립과 인과율 — 전화 한 통이 뒤흔드는 시간의 구조영화의 설정은 이렇습니다. 어린 시절 화재 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서연이 오랜만에 옛집으로 돌아옵니다. 휴대폰을 잃어버려 집 전화를 새로 설치했는데, 거기에 1999년에 같은 집에 갇혀 살던 영숙이 연결됩니다. 두 사람은 처음엔 장난 전화라고 생각하다가, 서연이 예고한 트럭 사고가 뉴..
성범죄 전과자가 출소 후 반경 500미터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과연 우리는 법을 믿고 기다릴 수 있을까요. 딸 둘을 키우는 아버지로서 이 질문이 저는 머릿속에서 좀처럼 떠나지 않았습니다. 넷플릭스 영화 '계시록'의 원작 웹툰을 처음 접했을 때, 그 불편한 질문이 다시 떠올랐습니다.종교적 광신이 어떻게 사람을 망가뜨리는가웹툰 '계시록'의 주인공 성민찬은 교인이 30명도 채 되지 않는 작은 개척 교회의 목사입니다. 어느 날 교회에 들어온 낯선 남자가 성범죄 전과자 권양대라는 걸 알게 된 그날 밤, 아들이 실종됐다는 아내의 전화가 걸려옵니다. 그 순간 번개가 치면서, 빗물에 번진 권양대의 사진이 악마 형상처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성민찬은 이걸 신의 계시라고 확신합니다.제가 이 대목을 읽으면..
솔직히 저는 스마트폰을 잃어버리는 게 그렇게 큰 사건이 될 줄 몰랐습니다. 지하철에서 핸드폰을 잃어버렸던 날, 몇 시간 만에 되찾았는데도 그 공포감은 며칠이 지나도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는 그 불안감이 단순한 과민반응이 아니었다는 걸 데이터와 서사 양쪽에서 동시에 증명해 보입니다. 스파이웨어 하나로 무너지는 일상 — 범인의 수법을 분석하면영화 속 범인 준영이 사용한 핵심 무기는 스파이웨어(Spyware)입니다. 여기서 스파이웨어란 피해자 몰래 기기에 설치돼 통화 내용, 문자 메시지, 위치 정보, 심지어 카메라와 마이크까지 원격으로 열람·제어하는 악성 소프트웨어를 말합니다. 제가 이 개념을 처음 제대로 이해한 건 영화 속 장면에서였는데, 준영이 수리점에 공기계를 들고 와 나미의 핸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