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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영화 <박열>을 보기 전까지 저는 관동대지진이 단순한 자연재해였다고만 알고 있었으니까요. 1923년 9월 1일, 규모 7.8의 대지진이 일본 간토 지방을 강타한 직후 벌어진 일—수천 명의 조선인이 아무 죄 없이 학살당했다는 사실을 마주하고서야, 이 역사를 왜 지금껏 몰랐는지 되묻게 되었습니다. 재난 앞에서 국가 권력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 그 선택의 무게가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낳는지를 이 글에서 짚어보겠습니다.

재난이 만들어낸 학살의 구조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일본 가나가와현 사가미만을 진앙으로 규모 7.8의 대지진이 발생했습니다. 5분 간격으로 세 차례 이어진 이 연속 지진은 규모 7.4와 7.2의 여진을 동반했고, 점심 준비로 불을 피우던 목조 건물들이 밀집한 도쿄·요코하마 일대는 삽시간에 대화재에 휩싸였습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이재민 약 340만 명, 사망자 13만 4천여 명, 손해액 약 55억 엔에 달하는 전대미문의 피해였습니다.
제가 이 수치를 처음 봤을 때 느낀 건 규모 자체에 대한 놀라움이 아니었습니다. 그 혼란 속에서 일본 내무성이 각 경찰서에 내린 지시—"조선인이 방화와 폭탄 테러, 강도를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가 공문서로 배포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유언비어(流言蜚語)란 근거 없이 퍼지는 해악적 소문을 가리키는데, 이 경우는 민간에서 자연 발생한 것이 아니라 국가 기관이 직접 유포한 공식 허위 정보였습니다. 그것이 신문을 타고 퍼지는 데는 하루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자경단(自警團)—재난 시 지역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꾸린 민간 치안 조직—이 죽창과 일본도, 총기까지 들고 조선인을 무차별 학살했습니다. 임신한 여성의 배를 가르고, 울음을 터뜨린 신생아마저 찔러 죽였다는 당시 목격자의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강과 아라카와 어귀가 피로 물들었다는 증언은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일본 군대와 경찰도 이를 방관하거나 가담했으며, 뒤늦게 개입했을 때 이미 대학살은 끝나 있었습니다.
- 내무성의 공식 문서를 통해 조선인 폭동설이 유포됨
- 자경단·군대·경찰이 조직적으로 학살에 가담 또는 방조
- 피해자 추산: 독립운동가 김승학의 기록 6,600명, 일본 정부 공식 발표는 233명으로 축소
- 2014년 한국 국가기록원 공개 명단에 10세 미만 아동 포함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법정을 무대로 삼은 두 사람
제가 직접 이 역사를 파고들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박열이라는 인물이 단순한 저항의 상징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1902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난 박열(본명 박준식)은 열다섯에 3.1 혁명에 가담했다가 퇴학당한 뒤 도쿄로 건너가 신문 배달을 하며 사회주의·아나키즘 운동에 발을 들였습니다. 아나키즘(Anarchism)이란 국가 권력과 모든 강제적 지배 구조를 부정하고 개인의 자유를 최고 가치로 삼는 사상입니다. 그는 이 사상을 바탕으로 비밀결사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하고 잡지를 발행하며 일본 제국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했습니다.
그의 연인이자 동지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인이었습니다. 1903년 요코하마 출생의 그녀는 부모에게 버려져 출생신고조차 못한 채 자랐고, 조선에서 3.1 운동을 직접 목격하며 조선인의 독립 의지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제 경험상, 타국의 독립운동에 자신의 삶을 던진 사람의 이야기는 단순한 연대가 아니라 뭔가 더 근본적인 자각에서 비롯됩니다. 가네코가 박열에게 먼저 동거를 제안할 만큼 능동적이고 당찬 인물이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방증합니다.
1923년 대학살 직후 체포된 두 사람은 일본 황태자 결혼식에 폭탄을 투척하려 했다는 혐의—이른바 대역죄(大逆罪), 즉 황실을 해치려 한 죄—로 기소되어 1926년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두 사람은 조선 전통 복장을 고집하고 조선어 통역을 요구했습니다. 법정 사진이 일본 언론에 실렸고, 그 파장으로 담당 판사가 해임되고 내각이 총사퇴했습니다. 이는 피고인이 법정을 일종의 퍼블리시티(publicity)—공론장에서 자신의 주장을 알리는 행위—의 장으로 활용한 보기 드문 사례였습니다. 당시로선 전례가 없었던 전략이었습니다.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후 1926년 7월, 스물셋의 가네코 후미코가 옥중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습니다. 사망 경위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고 공식 확인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박열은 22년 2개월의 옥살이를 마치고 1945년 10월 광복 후 석방되었습니다. 그가 가네코를 오래 애도했다는 기록은 단순한 연애 감정이 아니라 함께 싸운 동지에 대한 헌사였을 겁니다.
역사 왜곡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제 경험상 과거의 국가 폭력이 가장 위험해지는 순간은 그것이 잊힐 때가 아니라, 체계적으로 지워질 때입니다. 2013년 도쿄 주요 대사관 이전 과정에서 1923년 관동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명부와 3.1 운동 피살자 명단이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2014년 한국 국가기록원은 학살된 조선인 피해자 318명의 명단을 공개했고, 그 안에는 살해 방법과 함께 두 살배기 아이의 이름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출처: 국가기록원).
그런데 같은 해 한국 정부가 발표한 공식 피해 확정 인원은 단 21명이었습니다. 6,000명이 넘는 희생 추정치와의 간극이 너무 커서 저는 처음에 숫자를 잘못 읽은 줄 알았습니다. 진상규명(眞相糾明)이란 사건의 실제 경위와 책임 소재를 밝히는 절차를 말하는데, 이 경우에는 그 절차 자체가 피해 규모를 축소하는 방향으로 작동한 셈이었습니다.
일본 쪽 상황도 다르지 않습니다. 교과서 왜곡에 이어 정부 홈페이지에서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내용이 담긴 공식 보고서가 삭제된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학살을 직접 자행한 이들 중 법적 책임을 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당시 조선인들을 위해 사과문을 작성하고 박열의 공판을 무료로 변호했던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쓰지(布施辰治)는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습니다. 옳은 일을 한 사람이 처벌받고, 학살을 저지른 사람들은 무죄로 풀려났습니다(출처: NHK 아카이브).
영화 <박열>은 이 무거운 역사를 경쾌한 활극의 호흡으로 담아냈습니다. 저는 그 연출 방식에서 묘한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수천 명의 무고한 민간인이 억울하게 죽은 구조적 학살의 비극이, 두 주인공의 당돌한 쇼맨십과 로맨틱한 동지애로 치환될 때 관객이 얻는 건 카타르시스지만 잃는 건 역사의 무게감입니다. 물론 대중 서사가 역사 교과서일 필요는 없지만, 미완의 진상 규명이라는 현실적 과제를 개인의 영웅적 태도와 감정적 통쾌함으로 봉합하는 방식에는 윤리적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이 학살당한 이유가 뭔가요?
A. 일본 내무성이 경찰서에 "조선인이 방화와 폭탄 테러를 획책하고 있다"는 허위 공문을 배포한 것이 직접적 원인이었습니다. 여기에 1919년 3.1 운동 이후 조선인에 대한 경계심이 쌓여 있던 상황이 맞물리면서, 자경단과 군경이 아무 근거 없이 조선인을 무차별 학살했습니다. 당시 피해자 대부분은 일제 강점기로 삶의 터전을 잃고 도쿄에서 막노동을 하던 노동자들이었습니다.
Q. 박열은 왜 일본 황태자 결혼식에 폭탄을 던지려 했나요?
A. 박열은 조선 식민 통치의 최고 책임자인 일본 천황 체제에 정면으로 저항하는 상징적 행동을 계획했습니다. 실제로 폭탄 투척이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일본 경찰이 폭탄 구입 계획을 포착하면서 대역죄—황실을 해치려 한 죄—로 기소되어 1926년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습니다.
Q. 가네코 후미코는 어떻게 죽었나요?
A. 1926년 7월 13일, 스물셋의 나이로 옥중에서 사망했습니다. 사망 경위는 일본 당국에 의해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고 공식적인 사실 확인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설과 타살 의혹이 함께 존재하지만, 지금도 진상은 밝혀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Q. 조선인 학살 피해자 수가 왜 자료마다 다른가요?
A. 일본 정부가 당시 학살 규모를 233명으로 축소 발표한 반면, 독립운동가 김승학의 한국독립운동사에는 약 6,600명, 독일 외무성 문서에는 약 2만 명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신이 대거 암매장되거나 강에 버려졌고, 일본 측이 체계적으로 증거를 은폐했기 때문에 정확한 집계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2014년 한국 국가기록원이 공개한 확정 피해자 명단은 318명입니다.
Q. 박열은 광복 후 어떻게 됐나요?
A. 22년 2개월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1945년 10월 석방된 박열은 도쿄에서 신조선건설동맹을 결성하고, 김구의 요청으로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의사의 유해 송환을 맡았습니다. 1949년 귀국했으나 한국 전쟁 중 북한에 납북되었고, 1974년 평양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습니다.
결론
제가 이 역사를 공부하면서 가장 오래 남은 문장은 따로 있습니다. "분명히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수천 명의 이름이 담긴 명단이 발굴되고, 만삭의 여성이 학살당한 사실이 기록으로 남아 있어도, 법적 책임을 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과거의 잘못이 제대로 규명되고 사과받지 못한 역사는 반드시 반복될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재난과 혼란을 틈탄 혐오 정치, 소수자를 희생양으로 삼는 가짜 뉴스는 100년 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결기를 기억하는 방식은 영화관을 나서며 느끼는 카타르시스로 끝나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적 진실을 바로 세우는 일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왜곡에 맞서고, 기억을 보존하는 일 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응답입니다. 박열 평전과 관련 기록물을 직접 찾아보시길 권합니다. 영화보다 더 생생한 이야기가 거기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