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를 보다가 손에 땀을 쥐면서도 불편한 감정이 동시에 올라오는 경험을 하신 적 있습니까? 저는 ENA 드라마 를 보면서 정확히 그 감각을 느꼈습니다. 법 앞에 평등해야 할 현직 판사가 아들의 뺑소니 사망 사고를 숨기기 위해 직권 남용과 증거 인멸, 사법 방해를 차례로 저질러 나가는 이 서사가 숨 막힐 만큼 잘 만들어져 있는 동시에, 그 안에 담긴 윤리적 문제는 꽤 무겁게 가라앉았습니다.청렴한 판사가 사법 방해자가 되기까지일반적으로 법조인이 등장하는 범죄 드라마에서는 '권력이 법을 비틀다'는 구조가 공식처럼 쓰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작품이 조금 다른 지점을 건드린다고 느꼈습니다. 가해자가 비리 검사도, 부패한 정치인도 아닌, 오히려 공사 현장에 직접 찾아가 사진을 찍어 오고 법정에서 노동자 여섯 명의..
1분에 1억 원어치를 팔아치우는 탑 쇼호스트가 정작 잠 한 숨 제대로 못 잔다면, 그건 성공한 삶일까요, 아니면 망가진 삶일까요. SBS 수목 드라마 을 보다가 제가 멈춰버린 장면이 있었습니다. 주인공 담예진이 서랍에서 수면제를 꺼내 먹는 장면이었습니다. 그 장면이 웃음보다 먼저 불편하게 다가왔습니다. 번아웃 — 매진 도파민의 이면드라마 속 담예진은 누적 판매액 1조 원을 돌파한 쇼호스트입니다. 라이브 방송 중 제품을 직접 창문에 문질러 닦고, 고층 빌딩 외벽에서 시연을 펼치며, 콜 수가 폭주하는 순간을 "매진"이라는 한 단어로 압축해 즐깁니다. 제가 처음 이 장면들을 봤을 때는 통쾌하고 유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들여다보니 그 뒤에 있는 것이 심상치 않았습니다.예진은 만성 불면증(chro..
저도 처음엔 그냥 "예쁜 드라마"로 봤습니다. 공유의 얼굴, 캐나다 퀘벡 풍경, 메밀꽃 꽃말. 그런데 1화부터 3화를 몰아보고 나서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낭만적인 장면들 사이사이에 은탁이가 겪는 학대와 방치가 너무 가볍게 처리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거든요. 화면이 아름다울수록 그 불편함은 오히려 더 선명해졌습니다. 운명적 사랑이라는 판타지, 그 구조를 들여다보면도깨비의 세계관은 꽤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수백 년 전 전쟁 영웅으로 백성들에게 '신'이라 불렸던 김신은, 간신의 이간질로 의심을 품은 어린 왕에게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합니다. 가슴에 칼이 꽂힌 채 죽었지만, 충직한 가신의 헌신 덕분에 영생을 얻게 되죠. 이 '저주로서의 불멸'은 드라마의 핵심 장치입니다.여기서 핵심..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드라마 속 택시 폭발 장면을 보면서 '이게 그냥 오락용 장치겠지' 싶었는데, 실제로 TNT 제조 원리와 신분세탁 수법을 하나씩 뜯어보고 나니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민간인을 겨냥한 차량 폭발 테러와 조직적 신분 위장이 맞물리면 공권력이 얼마나 무력해지는지, 드라마 한 편이 생각보다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조직범죄와 폭탄 차량 테러, 현실에서도 가능한 이야기인가제가 이 장면을 처음 봤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저게 진짜 군용 폭약 맞아?"였습니다. 극 중에서 트라이나이트로톨루엔(TNT)이라는 이름이 직접 등장합니다. 트라이나이트로톨루엔이란 톨루엔에 질산과 황산을 반응시켜 만드는 고성능 폭발물로, 2차 세계대전 이후 군용 기준 폭약의 표준 단위로 쓰일 만..
라면을 끓이다 경찰에게 문을 열어주는 장면 하나가 저한테는 오래 남았습니다. 20년 전 억울하게 살인범으로 몰린 남자의 이야기인데, 극 중 김철진의 삶을 따라가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국가가 지켜주지 못한 사람에게 법 대신 무엇이 남는가. 모범택시 2는 그 물음을 정면으로 다루는 작품입니다. 허위 자백과 누명, 실제로 얼마나 벌어지는 일인가솔직히 처음 봤을 때는 설정이 너무 극단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고문으로 받아낸 허위 자백(false confession), 그러니까 피의자가 실제로 저지르지 않은 범죄를 수사 과정에서의 압박이나 물리적 강제로 인해 인정하게 되는 진술을 근거로 20년 형이 확정된다는 것이 현실에서도 가능한 이야기인지 반신반의했습니다.그런데 찾아볼수록 이건 픽션 속 과장이 ..
드라마 속 장면인데도 뉴스를 보는 것 같아 불편했습니다. 전도연, 김고은 주연의 는 캐스팅과 감독이 여러 차례 바뀌는 우여곡절 끝에 공개됐는데, 막상 보고 나니 그 과정이 무색할 만큼 묵직한 작품이었습니다. 두 여성의 자백 거래라는 설정 뒤에, 부실 초동 수사와 언론 플레이, 그리고 사이버 렉카가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를 아주 촘촘하게 그려냅니다.여론재판과 초동 수사 부실, 어디까지가 드라마일까뉴스에서 피의자의 무표정한 얼굴이 클로즈업될 때, 저는 그 장면이 왜 이렇게 길게 방송되는지 항상 의아했습니다. 자백의 대가에서 윤수가 남편 장례식에서 웃으며 조문객을 맞이하는 장면이 살인 혐의의 증거처럼 소비되는 방식을 보면서, 그 의아함이 다시 올라왔습니다.드라마는 초동 수사(初動 搜査)의 문제를 ..
기억을 잃으면 '나'도 사라질까요? 저는 오랫동안 그렇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를 보고 나서 그 생각이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해리성 기억상실증으로 모든 자서전적 정보를 잃은 검사 고지원이, 낯선 시골집에서 자신의 취향에 기겁하는 장면 하나가 그 오래된 확신을 산산이 부쉈습니다.기억은 사라져도 몸은 기억한다 — 해리성 기억상실의 실제드라마 속 고지원은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자신의 이름도, 나이도, 직업도 전혀 기억하지 못합니다. 의학적으로는 해리성 기억상실증(Dissociative Amnesia)으로 분류되는 상태입니다. 여기서 해리성 기억상실증이란, 외상이나 극심한 심리적 충격으로 인해 자아와 관련된 자서전적 기억이 선택적으로 차단되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단순한 건망증이나 뇌 손상과 달리, 언어·..
수십 년 만에 낯선 친척의 부고를 받고 얼떨결에 선산을 상속받는다는 설정, 현실에서도 드물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저도 먼 친척의 유산 정리 자리에 어색하게 앉아본 경험이 있어서인지, 드라마 의 첫 장면은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마음속으로 파고들었습니다. 탈륨 독살부터 엽총 살인까지, 단순한 유산 분쟁이 걷잡을 수 없는 강력 범죄로 번지는 전개가 섬뜩하면서도 눈을 떼기 어렵습니다.상속이라는 판도라의 상자 — 배경과 맥락드라마 의 출발점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균열입니다. 대학 시간강사로 하루하루를 버텨가던 윤서하가 경찰로부터 삼촌 윤명길의 사망 소식을 듣는 장면, 제가 직접 그 상황에 처한다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생각해 보았을 때 서하의 멍한 반응이 가장 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여섯 살에 아버지가 떠난 뒤..
살아남은 사람이 더 불행한 경우가 있을까요? 넷플릭스 드라마 를 보다가 저는 이 질문을 진지하게 붙들고 앉아 있었습니다. 호주의 작은 섬마을을 배경으로, 15년 전 폭풍우 속 사고로 형과 친구를 잃은 생존자 키런이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오래 묻혀 있던 진실들이 하나씩 수면 위로 올라옵니다. 그런데 그 진실을 파헤치던 사립탐정 브론테가 해변가에서 시신으로 발견되면서, 이야기는 단순한 귀향극을 훌쩍 넘어섭니다. 섬마을 미스터리 — 살인, 누명, 그리고 15년의 침묵제가 이 드라마를 보면서 가장 서늘했던 장면은 브론테의 죽음 자체보다, 진범 존이 치매를 앓는 노인 브라이언에게 혐의를 교묘하게 뒤집어씌우는 대목이었습니다. 브론테를 우발적으로 살해한 뒤 시신을 해변으로 옮기고, 마침 산책 중이던 브라이언을 자신의 ..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일부러 틀리게 전달한다면, 그게 과연 낭만일 수 있을까요. 드라마 를 보다가 저는 이 질문 앞에서 멈춰 버렸습니다. 설레는 장면마다 박자 맞게 웃으면서도 어딘가 찜찜한 감각이 사라지지 않았거든요. 그 불편함의 정체를 좀 더 따져보고 싶어서 이 글을 씁니다.직업윤리: 통역사는 원래 어떤 책임을 지는 사람인가요통역사라는 직업을 떠올릴 때 많은 분들이 단순히 '언어를 잘하는 사람' 정도로 생각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전문 통역사에게 요구되는 핵심 원칙은 충실성(Fidelity)입니다. 여기서 충실성이란 원화자의 발언 내용과 의도를 어떠한 가감도 없이 그대로 전달해야 한다는 직업적 의무를 말합니다. 개인의 감정이나 판단이 개입될 여지가 애초에 없는 것이죠.국제통역번역협회(AI..